밑줄긋기
작성자 이동주
작성일 2010-03-18 (목)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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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36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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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서평]-(2)_'세상속의 교회 교회속의 세상'을 읽고
(이어서)
이제 '교회의 세속화'  다음으로 "하나님은 왜 악을 허용하시는가?"에 대한 주제로 넘어가고자 합니다.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 생각합니다.
사실,  본서의 저자는 "하나님은 왜 악을 허용하시는가?"라는 타이틀을 사용한 적이 없지만 제가 볼 때 가장 적절한 타이틀 같아서 사용했습니다. 왜햐나면 종국적으로 저자가 이 책을 통해서 뿐 아니라 자신의 인생을 걸고 던진 곳이 바로 이 주제였고 저자가 여기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는 내용이 이 책의 나머지(6장~9장) 부분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저자에게 감사 드리는 것은, 책의 곳곳에 삶의 흔적들을 많이 남겨 놓으셔서 어떻게 해서 저자가 본 서에 풀어 놓은 것과 같은 '신앙관'을 가지게 되었는지 알아가기가 쉬웠다는 점입니다.)
 
7장의 260p와 261p입니다. 여기에서 저자는 한동대학교에서 학생들과 나눈 일화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중략) 기독교 대학에서 교수 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저는 그 선배와 똑같은 얼굴의 젊은이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기독교 세계관과 관련된 과목들을 가르칠 때면, 저는 늘 20세기를 흔들었던 대량 학살 사건들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아우슈비츠, 굴락, 킬링필드, 르완다, 보스니아에서 수백만명의 무고한 인명이 죽어 가는 동안 하나님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계셨느냐는 깊은 고통의 외침을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나는 찾을 수 없다고 솔직하게 고백했습니다...(중략)
 
사실, 저는 저자의 이 솔직한 고백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저자가 옆에 있었다면 제가 몇 번이고 되물었을 것입니다. "진짜 진짜 두식이 형, 정말 정말 답을 찾지 못한 거예요?"라고 말입니다. 만약 저자의 고백이 사실이라면 이는 정말 '넌센스'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어떤 형태로든 성경적인 해답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사실 이 책은, 이런 류의 책은 의미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제가 알고 있는 한) 저 문제에 대하여 성경적인 해답을 갖지 못한 상태에서는 올바른 '교회관'을 가질 수가 없다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거기서 머물렀어야 합니다. 그가 진짜 교회를 사랑하고 심지어 이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교회를 향한 애통함과 그런 슬픔을 느껴 본 적이 없는 분들은 지금 조용히 이 책을 덮었으면 좋겠습니다."(33p)라는 말을 진정으로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거기서 머물렀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식으로든 성경적인 답을 찾을 때까지 말입니다. 그 답을 찾기 전에는 절대로 한 걸음 더 나아가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답이 없는 상태에서 세운 집은 사상누각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자는 그 질문은 그대로 묻어둔 채 더 나아갔던 것 같습니다. 저자의 표현대로 저자가 '소수의 길'을 간 것이 그 때문인 것 같고, 굴절된 시각에서 현대의 교회를 바라보는 것 또한 이 문제에 기인한 것으로 판단이 됩니다.
 
답을 찾기 전에 이런 글을 쓰셨으니 글 속에 '독'과 '분노'가 있는 것입니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의 반응은 딱 2가지 일 것입니다. 하나는 '아, 속이 시원하다. 내가 하고 싶었던 말 다 해주네. 맞어 이것 때문에 교회가 욕얻어 먹는 거야...'이고 다른 하나는 '뭐야, 이거. 답답하네. 이건 아닌데...정말 아닌데...' 라는 반응입니다.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씀 드립니다. 우리는 이 책 바로 전에 '꿈을 버려라'라는 정홍준 목사님의 책을 이미 리뷰하였습니다. 여기에도 현재 한국교회와 이 세대를 비판하는 글이 곳곳에 실려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글들에서 전혀 거부감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양심 깊은 곳을 채찍질하는 글들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동일한 걱정과 염려와 충고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차이는 어디서 발생하는 것일까요? 
 
그러면 "하나님은 왜 악을 허용하실까요? 또는 왜 하나님은 전쟁을 허용하실까요?" 이에 대한 답을 논하는 것이 이 서평의 목적이 아니니, 제가 도움이 될만한 몇 가지를 알려드리고 다음 주제로 넘어갔으면 합니다.
 
성경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만 저는 개인적으로 구약성경 '하박국'서를 깊게 묵상하시길 권하고 싶습니다. 도움이 될만한 책이 있습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의 '왜 하나님은 전쟁을 허용하실까'(목회자료사)와 '하나님은 아직도 역사를 주관하실까? 하박국 강해'(목회자료사) 그리고 김서택 목사의 '하나님은 왜 악을 허용하시는가(하박국 강해, 홍성사)가 있습니다.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여하튼 제 생각에 저자는 "왜 하나님은 악을 허용하시는가?" 바로 이 단추에서 부터 어긋나기 시작한 듯 합니다. 해답을 얻지 못한 채 어떤 식으로든지 그 괴리를 매꿔 보고자 노력한 것이, 저자에게는 '소수의 길'로 눈을 돌리게 한 듯 합니다. 그리고 저는 바로 여기서부터 저자의 '교회관(신앙관)'과 '역사관'에 큰 오류가 생기기 시작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로 역사관입니다. 사실 역사란 역사를 쓴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내용은 많이 달라질 것이다. 한 번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만약 예수님의 공생애를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등 예수님의 제자들이나 그 측근들이 쓴 것이 아니라 당시 대제사장이나 최고 서기관, 바리새인들이 기록했다면 어떤 기록이 나왔을까요?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바로 이 후자의 관점에서 기록된 역사적 흐름을 바탕으로 저자는 콘스탄티누스 이후 16세기까지의 기독역사를 열거하시는 것 같습니다. 역사적 사건에서 보다 깊은 행간의 의미를 읽으셨으면 합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쓰시는 교회사가 있다면 이는 분명히 종교지도자들 중심의 역사가 아니라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살다간 참 그리스도인들의 역사로 수 놓아져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에 따른 ‘죽음’과 ‘죄’에 관한 가치관입니다.(이는 아주 중요한 그리스도인들의 가치관입니다.) 저자는 ‘죄’와 ‘죽음’에 대해서 큰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철저하게 사람의 입장에서 본 죄와 죽음으로만 일관하고 있습니다. 마치 저자는 설교 중이시던 예수님께 갑자기 찾아와 헤롯이 그 제물에 갈리리 사람의 피를 섞은 것을 고한 어떤 사람과 같다는 것입니다. 특히 ‘죽음’에 관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시각으로 바라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린 우리 눈에만 보이는 참 그리스도인들의 비참한 죽음에 대하여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특히 나의 사랑하는 측근들, 가족들의 갑작스런 죽음을 도저히 설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더 길게 이야기할 수 없을 듯 합니다. [이 주제에 관해서는 누가복음 12장과 13장 초반부를 꼭 묵상해 보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나중에 따로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두번째로 신앙관입니다. 한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151페이지 입니다. 이단과 정통에 대해서 이야기하시면서 이런 이야기를 하십니다. '전 세계에서 소수파였던 유대인, 유대인 중에서도 소수파였던 예수님은 그럴 힘도 의지도 없었습니다. 생명을 걸고 소수의 길을 걸었고 대부분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던 예수님의 제자들이 정통과 이단을 정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 부분 또한 저를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왜냐하면 저자는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소수의 길'이라 표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신 길은 ‘좁은 길’이고 ‘십자가의 길’이지 '소수의 길'은 아닌 것입니다. (아니 더 정확히 표현하면 저자가 이야기하고 있는 이 '소수의 길'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묻고 싶습니다. 양심적 병역거부를 인정하는 것이 소수의 길인가요? 동성애자를 인정하는 것이 소수의 길인가요? 그래서 그 길이 예수님께서 가신 '십자가의 길'인가요? 제가 생각할 때는 이런 '길'은 '십자가의 길', '예수님께서 가신 길'과는 전혀 관계없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말이 나왔으니 묻겠습니다. (233p) 저자는 오래전에 CBS 방송토론에서 '동성애'관련한 토론의 사회를 본 적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때 동성애자 사역을 하던 목사님이 동성애가 죄인지 아닌지에 대한 답을 회피하시는 것을 보고 목사님께 아래와 같은 질문을 던졌다고 했습니다. "목사님, 동성애자 사역이 중요한 것은 알겠는데, 그래서 동성애가 죄란 말입니까? 아니란 말입니까?"
 
저는 같은 질문을 저자에게 하고 싶습니다. 동성애가 죄입니까? 아닙니까? 동성애자 친구가 하나도 없으면 신앙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이 세상 모든 교회가 동성애자 선교에 관심을 가져야합니까? 
 
제가 답변을 하겠습니다. 동성애는 분명 죄입니다. 동성애자가 거기에서 돌이킬 수 있도록, 그리고 이분들도 예수님을 바로 믿고, 그 생활에서 돌이킬 수 있도록 돕는 사역이 분명 필요합니다. 하지만 주객이 전도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우리가 '사랑'에 풍성해도 예수님보다 더 사랑이 많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 동성애 사역이 그들로 하여금 그 죄된 삶에서 돌이키게 할 수 없다면,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그 가운데 여전히 머물게 한다면, 분명 그 사역은 문제가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성경에 그 본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서 간음한 여인을 현장에서 잡아와서 예수님께 다그친 그 사건을 다 기억하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이라 말씀하셨습니까? '너희 중 죄 없는 자들이 먼저 돌로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그 어느 누구도 돌로치는 자 없었습니다. 모두 도망갔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이 간음한 여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여러분 이 말씀을 들은 그녀가 그 이후에 여전히 계속해서 간음을 행했을까요? 분명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특수선교에서 가장 조심해야할 부분이 이런 부분입니다. 그들과 함께 있다보면 그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서 부러 예민한 부분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는 암에 걸린 환자에게 머어큐로크롬 액을 바르면 금방 나을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의사와 같은 것입니다. 긍휼과 사랑이 지나친 것은 더 나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보다 하나님보다 더 긍휼과 사랑에 뛰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은 크게 2가지 입니다. 잘 아시는 바대로 ‘사랑’과 ‘공의’입니다. 본 서를 통해 제가 파악한 바로는 저자는 지나치게 ‘사랑’에만 집착하고 있는 듯 합니다. 저자의 생각에는, 하나님은 사랑에 풍성하셔야 하기 때문에 전쟁과 기근과 킬링필드와 아우슈비츠를 허용하시는 하나님을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공의’의 하나님이심도 기억하셔야 할 것입니다. 이 둘은 반대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자식을 길러 보셨으면 알 것입니다. 회초리를 드는 부모를 향해 아이를 향한 사랑이 없다고 주장하며 회초리를 전혀 들지 않는 부모가 있다면 이는 가장 어리석은 부모일 것입니다. 아이를 망칠 것이 자명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의 성품은 완벽한 조화를 이룹니다. 묻겠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피값과 비교하여 아우슈비츠, 킬링필드, 르완다 등 저자 뿐 아니라 우리 인간들이 생각하기에 가장 불의하다 생각하는 피값을 모두 합친 것(아니 모든 인류의 피값 전부)과 비교할 때 어느 것이 큰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당연히 예수님의 피값이 더 큰 것입니다. (아니, 정말로) 크다고 고백하셔야 합니다.(이것을 부인하면 진짜 이단입니다.) 그렇다면 기억하셔야 할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그 귀한 예수님의 목숨도 가차 없이 버리신 하나님의 공의를 말입니다. 하물며 우리들의 불의한 목숨겠습니까…. 내가 이해할 수 없다 하여 하나님의 크신 경륜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또는 임의로 해석하는 것은 가장 어리석은 자의 결론임을 기억하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해서입니다. 앞선 동성애자에 관한 이야기도 마찬가지이지만 지금 이 문제는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교리와 논리의 싸움입니다.(안타깝게도 저자는 본서에서 특히 ‘교리’는 중요한 것이 아니니 그냥 접어두자는 참으로 무서운 발언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같은 논리가 성경에 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붙잡기 위해서 예수님의 말을 책잡으려고 시험을 하였습니다. 당시 유대인들 사이에서 이슈가 된 사안은 로마에 내는 "세금"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질문합니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그들이 생각할 때는 이것은 답이 없는 변론이어서 가하다고 해도 올무에 걸리고 불가하다고 해도 올무에 걸리는 질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대답하셨습니까? "데나리온 하나를 내게 보이라 뉘 화상과 글이 여기 있느냐? ...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맞습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세상 살아가면서 그리스도인이기 이전에 당연히 사회와 국가의 일원으로 해야할 의무들이 있습니다. 마땅히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논리의 예는 얼마든지 더 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관영한 죄악과 세상 주관자들과 악한 영들을 허용하셨습니다.(시간적 제약이 있지만) 그래서 전쟁도 허용하셨습니다. 의인의 비참한 죽음도 허용하셨습니다. 자꾸만 결론이 하나로 귀결됩니다. 하나님께서 악을 허용하셨습니다. 그 이유를 꼭 찾아내어서 본인의 것으로 만드는 저자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래서 저자에게 한 가지 더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예수님 처럼'(맥스 루카도)이란 책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만약 오늘 내가 예수님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예수님께서 내가 되어서 이 책을 쓴 컴퓨터 앞에 앉아 계시다면 이런 글이 나왔을까요? 아니면, WWJD(What Would Jesus Do?),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챨스쉘던)라는 질문을 이 책의 출판을 앞두고 진지하게 질문했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출판하셨겠습니까?
 
끝으로 저도 함께 공감한 내용에 대해서 말씀 드리고 서평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보수와 진보에 관한 이야기로 106p에 있는 내용입니다. '성경을 제대로 읽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진보적 기독교인들도 별로 다를 것이 없습니다. 보수 기독교인들이 성경의 읽고 싶은 부분만 읽는다면, 진보 기독교인들은 아예 성경자체를 읽지 않는 것 같습니다...."
 
정말 공감하는 내용이고 이것은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랫동안 중고등부 교사와 몇 년간 청년회를 이끌었던 경험의 결과와 동일합니다. 사실 저는 이 서평을 달면서 무척 슬펐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류의 논평과 논쟁은 사실 40 줄에 들어선 저희 세대가 할 일이 아니라 20대의 젊은 청년들이 이미 했어야 할 고민들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80년대 90년대 까지만 하더라도 교회들마다 이런 신앙적인 고민들로 몸부림치는 젊은 세대가 정말 많았습니다. 그러나 점점 그 수가 줄고 있고, 아니 솔직히 지금은 찾아보기가 어려운 시대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천년기념물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자가 마지막 장, '실험하는 교회'를 통해서 권하는 많은 실험들에 대해서도 공감합니다. 그러나 꼭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해 아래 새 것은 없습니다. 사실, 저자가 권하는 그런 실험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있어왔습니다. (두식이형, 정말 믿어도 됩니다. 진짜 있습니다. 다시 잘 찾아 보시기 바랍니다. 제가 알고 있는 교회들만해도 제 열손가락을 벗어납니다. 즉, 두식이 형이 말씀하시는 ‘그나마 괜찮은’ 교회 그 이상으로 괜찮은 교회들이 많다는 뜻입니다.) 저자만 몰랐을 뿐입니다. 왜냐하면 저자는 내놓라하는 대형교회들만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아합과 이세벨만 보고 있었던 엘리야 처럼 말입니다. 로뎀나무 아래에서 죽기를 구했던 그 엘리야에게, 그리고 호렙산 동굴에서 부르짖는 엘리야에게 여호와 하나님께서 무엇이라 말씀하셨습니까? 바알에게 무릎꿇지 않은 7000명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회에 대해서 고민하고 아파하고 눈물 흘리며 남모르게 기도하는 자들과 그런 교회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사실을 기억하셨으면 합니다. 적어도 두식이 형이 생각하시는 것보다 7000배는 많을 것입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p.s.
 1) 저의 지나친 생각이 추측하는 범죄(고범죄)를 저지르는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이 책을 읽어 가면서 저 이면에 궁금한 것이 있었습니다. 왜 홍성사가 이 책의 출판을 허락(허용)했는지 말입니다. 저 또한 홍성사를 좋아하고 쿰회원이기도 했으며 이재철 목사님을 존경하는 사람 중에 한 명입니다. 제 신앙여정에 홍성사에서 출판한 많은 책들이 제게 큰 영향을 끼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좀 압니다. 홍성사에서 출판되는 책들의 영적인 색깔들을 말입니다.
사실,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오재의 화원’이라는 블로그에서 이미 오재님이 쓰신 본 서의 서평도 읽었고, 공교롭게도 그 글에 댓글을 다신, 이 책의 제작자(누구인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홍성사의 담당자이겠지요)의 글도 읽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근래 이재철 목사님과 100주년 기념교회가 처한 상황과 겪고 계신 어려움과 이 책의 출판이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저의 고범죄를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지난 가을 교회 비전홈스쿨 학생들과 양화진에 방문했을 때 저도 그 설문지에 서명을 했지만… 참으로 안타까운 한국교회의 현실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처한 상황이 어렵더라도 성경은 우리에게 오래참음 중에 기도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름아이콘 이민영
2010-05-12 00:59
잘 읽었습니다. 시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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