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긋기
작성자 김기민
작성일 2013-08-22 (목) 11:08
ㆍ조회: 43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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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철 목사가 환우들께 전하는 위로와 치유의 메시지
 
다 나음을
 
사도행전 5장 12-16절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나매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 그 나머지는 감히 그들과 상종하는 사람이 없으나 백성이 칭송하더라 믿고 주께로 나아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 심지어 병든 사람을 메고 거리에 나가 침대와 요 위에 누이고 베드로가 지날 때에 혹 그의 그림자라도 누구에게 덮일까 바라고 예루살렘 부근의 수많은 사람들도 모여 병든 사람과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 받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다 나음을 얻으니라
 
 

한 성도님이 믿음의 어려움을 하소연했습니다. 자신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 자체는 의심하지 않지만, 세상을 보면 하나님이 너무나도 잔인하게만 여겨져 성경이 전하는 하나님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든 단적인 예가 동물 세계의 먹이사슬이었습니다. 먹이사슬은 철저하게 잔인한 약육강식의 법칙 위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크고 강한 짐승이 작고 약한 짐승을 먹이로 삼아 생존합니다. 그 짐승 역시 자기보다 더 센 짐승을 위한 제물이 되는 것은 물론입니다. 작은 짐승일수록 귀엽고 사랑스럽습니다. 그 예쁘고도 여린 생명이 단지 약하다는 이유만으로 강한 것의 생존을 위한 제물이 되어야 한다면, 그와 같은 잔인한 약육강식의 먹이사슬 속에 동물의 세계를 만드신 하나님은 애당초 잔인한 분이시지 않겠습니까? 그 성도님은 텔레비전을 통해 동물의 세계를 볼 때마다 하나님의 잔인성이 너무나 두드러져 보여 그런 프로그램을 끝까지 볼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성경 말씀은 말할 것도 없고, 하나님의 사랑이니 자비니 하는 말들을 도저히 믿을 수 없다며 제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 성도님의 지적에는 확실히 일리가 있습니다. 동물 세계의 먹이사슬을 보면서 하나님의 잔인성을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어쩌면 그 사람이 이상한 사람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 세상의 마지막 날, 다시 말해 하나님에 의한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하는 날의 특징을 설명하는 가운데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습니다.
 
그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사 11:6-8).
 
한마디로 그날이 오면, 사자를 비롯한 모든 육식동물이 초식동물이 되어 동물 세계의 먹이사슬이 해체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어린 양과 어린 염소 그리고 송아지가 맹수와 함께, 젖 먹는 아이가 독사와 함께 어울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생각만 해도 아름답고 평화로운 광경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여전히 질문은 계속됩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역사의 종말이 있고서야 동물의 세계에서 먹이사슬을 해체하시는 것입니까? 왜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실 때부터 동물의 세계에 아예 먹이사슬이 없게 하시지는 않았습니까? 왜 창조하실 때에는 여린 것이 거친 것의 제물이 되지 않을 수 없도록 잔인하게 만드셨습니까?
일견 타당해 보이는 이 질문들에 대한 해답은 한마디면 족합니다. 그런 질문 자체가 적절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실 때 물을 하늘 위의 물과 하늘 아래의 물로 나누셨습니다. 하늘 아래의 바다와는 별도로 하늘 위에도 물을 두신 것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하늘의 대기권 밖을 두터운 물층이 뒤덮고 있어, 지구가 태양의 직사광선에 직접 노출되지 않는 형국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상태의 지구 위에 사람과 동물을 살게 하셨습니다. 창세기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수명이 수백 년에 달했던 것은, 그처럼 특수한 자연 조건 속에서 가능한 일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거리로 주노라(창 1:30).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짐승의 먹이는 애당초 풀이었습니다. 모든 짐승이 예외 없이 초식동물이었다는 말입니다. 하늘의 대기권을 물이 감싸고 있는 조건하에서는 육식동물이 존재할 수도, 존재할 필요도 없었던 것입니다. 육식동물이 없다는 것은 먹이사슬이 없다는 말이기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모든 동물들이, 그리고 어린아이와 독사가 한데 어울렸을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과 범죄,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거부하는 인간의 완악함은 끝내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하였습니다. 물, 즉 홍수에 의한 심판이었습니다. 그 무서운 심판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경외하던 노아로 하여금 구원의 방주를 짓게 하시고, 노아의 여덟 식구 그리고 땅 위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 둘씩을 방주 속에서 살아남게 하셨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노아로 하여금 짐승과 새의 먹이로 미리 준비하게 하신 양식 역시 풀이었습니다. 그때까지도 모든 짐승이 초식동물이었던 것입니다. 만약 그때 동물의 세계에 지금과 같은 먹이사슬이 있었다면 사자와 호랑이처럼 강한 동물 이외에는 노아의 방주 속에서 모조리 죽었을 것이요, 짐승들에게 그 방주는 구원의 방주가 아니라 잔인한 죽음의 방주가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 방주가 모든 짐승에게도 구원의 방주일 수 있었던 것은, 당시의 모든 짐승이 초식동물이었기 때문입니다.
드디어 하나님의 심판인 홍수가 터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40일 동안 밤낮 쉬지 않고 내렸던 비는 하늘의 구름에서 생성된 비가 아니었습니다. 창세기 7장 11절의 증언처럼, 하나님께서 하늘의 창문들을 여시고 대기권을 감싸고 있던 하늘 위의 물을 쏟아부으신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살아남은 인간과 짐승들은 태양의 직사광선을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직사광선과 지구의 생물 사이에서 차단막 구실을 하던 하늘의 물층이 사라져 버린 탓이었습니다. 그 엄청난 자연계의 변동이 수반한 가장 두드러진 두 가지 특징은 그 이후 인간의 수명이 단축되었다는 것과, 동물 가운데 육식을 하지 않고는 생존할 수 없는 동물이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동물 세계에 드디어 먹이사슬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 모든 현상은 직사광선의 폐해를 차단해 주던 보호막이 상실된 결과였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약육강식의 먹이사슬 속에 있는 잔인한 동물의 세계는 하나님의 책임이 아닙니다. 그것은 본래 있던 자연환경의 파괴를 초래한 인간의 죄 탓이기에, 결국 인간의 책임입니다. 인간의 죄가 생태계와 평화스럽던 동물 세계의 질서를 파괴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사야 선지자가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할 때 약한 동물과 맹수가, 그리고 어린아이와 독사가 함께 어울릴 것이라 예언한 것은, 그때가 되어서야 하나님께서 먹이사슬을 해체하신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래 창조하신 대로 동물 세계를 회복시키신다는 의미임을 알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병들게 만들고, 인간을 질병 가운데 내버려 두시느냐고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또한 적절한 질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본래 죽지 않는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죽지 않는다는 것은 병들지 않는 존재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죄가 죽음을 자초하였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티끌만 한 죄도 용납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죽지 않는 존재로 창조된 인간이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은, 병과 무관하던 인간의 육체가 병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살아 있는 동안에도 각종 질병에 시달리고, 또 병으로 죽어 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 역시 하나님의 책임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병은 전적으로 인간의 죄가 초래한 결과이므로, 그 역시 인간의 책임입니다. 이 말의 의미를 오해하지 마십시오. 지금 누군가가 어떤 병으로 시달리고 있다면 바로 그 특정 병의 원인이 그 당사자의 죄에 있다거나, 그가 다른 사람보다 죄가 많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병들지 않아야 할 인간이 병들게 된 근본 원인이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인함이기에, 그 근본책임 또한 하나님이 아닌 인간에게 있다는 뜻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에서의 일입니다. 오늘날 독일 기독교의 양심이라 불리는 본회퍼 목사가 히틀러에게 저항하다가 교수형을 당하기 전, 본회퍼와 연인 사이였던 마리아라는 여성이 있었습니다. 그녀의 아버지와 오빠가 히틀러의 나치군에 강제 징집되었다가, 둘 다 전장에서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졸지에 사랑하는 아버지와 오빠를 동시에 잃은 마리아, 미치광이에 지나지 않는 히틀러에게 사랑하는 그 두 사람을 빼앗긴 마리아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도저히 그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본회퍼 목사에게,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생명을 그토록 무자비하게 빼앗아 가시느냐고 물었습니다. 본회퍼 목사가 그녀에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사람을 죽이는 것은 세상과 인간의 증오와 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세상과 인간이 죽인 사람을 살리십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버지와 오빠의 삶을 마치게 하신 것이 아니라, 그분들로 하여금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감동적인 말입니까? 하나님의 구원과 사랑을 어찌 이보다 더 간결하고도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 이 세상에서 인간이 안고 있는 모든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과 책임은 인간에게 있습니다. 인간의 죄가 낙원을 상실케 했고, 생태계와 동물 세계의 질서를 파괴했으며, 스스로 죽음과 질병을 초래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저지른 문제투성이의 세상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인간이 파괴한 생태계 속에서 당신의 피조 세계를 당신의 능력으로 보존하고 계십니다. 질병의 노예 된 인간에게 의학의 진보란 선물을 주셔서 질병을 극복하게 하시고, 때로는 초월적인 당신의 능력으로 치유해 주시기도 합니다. 그뿐 아니라 당신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주시어 우리의 죗값을 치르게 하심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심과 동시에 잃어버린 낙원 대신에 그보다 더 좋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막 2:17).
 
우리가 영육 간에 병들지 않는 존재라면, 우리에겐 치유자가 필요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생이 공동묘지에서 끝날 수밖에 없는 죄인이 아니라면, 우리에게는 구원자가 필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영육 간에 병들고, 우리의 결국이 죽음일 수밖에 없는 죄인이기에 우리를 영육 간에 살려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구원자, 치유자가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 스스로 야기한 모든 문제에도 불구하고 그 문제로부터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이 강조하는 바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속이려 했던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사건 이후의 일을 본문 12-13절이 전해 주고 있습니다.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나매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 그 나머지는 감히 그들과 상종하는 사람이 없으나 백성이 칭송하더라.

사도들을 통하여 주님의 능력이 계속 드러났고, 믿는 사람들은 솔로몬의 행각에 모여 하나님의 말씀을 배웠습니다. 믿는 사람들과 상종하지 않는 불신자들조차도 교인들의 변화된 삶을 칭송하였습니다.
 
믿고 주께로 나아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 심지어 병든 사람을 메고 거리에 나가 침대와 요 위에 누이고 베드로가 지날 때에 혹 그의 그림자라도 누구에게 덮일까 바라고(14-15절).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가운데, 스스로 운신조차 불가능한 중환자를 침대와 요에 누인 채로 사도들을 찾아왔습니다. ‘침대’로 번역된 헬라어 ‘클리나리온’은 본래 침대를 가리키는 ‘클리네’의 지소사입니다. 지소사는 본래의 개념보다 작은 것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이를테면 본문이 언급한 침대는 정상적인 침대로 분류될 수 없는 간이용 침상을 의미합니다. 또 ‘요’로 번역된 ‘크라바토스’는 거적자리를 뜻합니다.
본문 속 사람들은 평소에 침대로 분류될 수도 없는 간이용 침상이나 거적자리를 사용하는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형편에 환자의 병세가 아무리 중해도 의사를 찾을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중에는 치료비로 재산을 다 날리고도 병이 낫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환자를 간이용 침상이나 거적자리에 누인 채로 사도들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운집해 있어 사도들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그들은 환자의 침상이나 거적자리를 베드로가 지나가는 길목에 두었습니다. 혹 지나가는 베드로의 그림자라도 환자에게 덮인다면 환자가 나을 것이란 믿음으로 인함이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베드로 개인을 우상으로 여긴 것이 아니라, 사도들이 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그만큼 간절히 믿었음을 의미합니다. 가난하기 짝이 없었던 그들의 믿음이 얼마나 간절했을 것인지는 능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본문 16절이 그 결과를 전해 주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부근의 수많은 사람들도 모여 병든 사람과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 받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다 나음을 얻으니라.
 
베드로의 그림자라도 덮이기를 바랐던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사도들을 찾은 모든 병자들과, 심지어는 귀신 들렸던 사람까지도 다 나음을 얻었습니다. 다 나음을 얻었다는 문장이 원문에는 물론 수동태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 스스로 나은 것이 아니라, 사도들을 통해 역사하신 주님에 의해 치유받았음을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나음을 얻다’라는 동사 ‘데라퓨오’가 본래 ‘섬기다’는 의미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섬김에 의해 그들은 영육 간에 다 나음을 얻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귀한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20장 28절을 통해,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인간으로부터 섬김을 받으시기 위함이 아니라 도리어 인간을 섬기시기 위함임을 밝히셨습니다. 따라서 주님께 나아온 병자들이 다 나음을 얻었다는 본문을 통해, 우리는 주님께서 인간을 섬기신 섬김의 주요 내용이 병 고침, 즉 치유였음을 알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영육 간에 병들어 죽어 가는 죄인을 살리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구원자시기 때문입니다.

본문 속 사람들이 다 나음을 입었다고 해서, 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의 육체적 질병이 다 나았던 것은 아닙니다. 위대한 사도 바울도 평생 병자로 살았고, 구약에서 수많은 기적을 행하였던 기적의 선지자 엘리사도 병으로 죽었습니다. 왜 그들의 병은 낫지 않았겠습니까? 그들의 믿음이 부족하거나, 다른 사람보다 죄가 많아 주님께서 치유해 주시지 않은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의 육체적 약함으로 인해 더더욱 주님의 은혜 속에 거하는 겸손한 영적 지도자로 평생 살게 해주시려는 주님의 배려였습니다. 저 역시 폐와 허리 그리고 왼쪽 무릎에 지병을 지니고 있지만, 그로 인해 저의 영혼이 늘 주님의 은혜 속에서 살지 않을 수 없음을 주님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병들었을 때 주님께서 우리의 육체적 질병을 치유해 주실 수도 있고, 우리로 하여금 질병을 지닌 채로 살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주시고자 하는 것은 언젠가 썩어 없어질 육체만의 강건함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육체의 질병이 낫든 혹은 낫지 않든, 그 어느 쪽이든,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원히 살리시고 우리의 영혼을 더욱 강건케 해주시기 위함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모든 병자가 다 나음을 얻었다는 오늘 본문을 맞는 이 시간,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66권으로 이루어져 있는 성경은 총 1,754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으로, 성경 전체의 절수는 무려 31,173절이나 됩니다. 참으로 어마어마한 양입니다. 그 반면에 오늘, 2006년 9월 네 번째 주일을 맞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사도행전 5장 12절부터 16절까지 불과 다섯 절에 지나지 않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31,173개의 구절 중에서 주일예배 시간에 이 다섯 구절을 만날 수 있는 확률은 6,235분의 1밖에 안 됩니다. 0.016퍼센트의 확률밖에 없는 이 다섯 구절의 말씀을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은, 바로 이 본문 속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당신께 나아가는 사람을 영육 간에 살려 주시는 치유자이심을 믿게 해주시기 위함이 아니겠습니까? 아니, 이 말씀을 믿는 우리 모두로 하여금 영적으로든 육적으로든, 다 나음을 얻게 해주시기 위함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우리에게는 우리가 붙잡아야 할 주님의 옷자락이나 사도들이 없습니다. 우리를 덮어 줄 베드로의 그림자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살아 계신 주님의 영이, 2천 년 전 주님께 나아갔던 본문의 병자들을 다 낫게 하셨던 그 주님의 영이, 지금 우리를 섬기시기 위해 우리와 함께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음으로 우리의 손을 주님께 내밀 때, 주님께서는 우리의 손을 당신의 도구로 사용하실 것입니다. 갈릴리의 어부였던 베드로의 거친 손을 당신의 도구로 쓰신 것처럼 말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제 우리 모두 우리의 오른손을 가슴 위에 올리십시다. 그리고 병든 우리의 영혼을 고쳐 주시고, 연약한 우리의 영혼을 강건하게 해주시기를 기도하십시다. 세상의 의술로 치료할 수 없는 지병을 지닌 분들은 자신의 환부에 또 다른 손을 얹고, 주님께서 다 나음을 얻게 해주시기를 간구하십시다. 그리고 그 결과는 주님께 맡기십시다. 사도 바울처럼 육체의 질병은 나음을 얻지 못할지라도, 도리어 그로 인해 우리의 영혼을 더욱 강건케 하시는 주님께 감사드리십시다. 그때 영적으로든 육적으로든, 오늘은 우리 모두에게 진정한 치유의 날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죄가 낙원을 상실케 했고, 자연환경과 동물 세계의 질서를 파괴했으며, 그것도 모자라 온갖 질병과 죽음마저 초래하였습니다. 난마亂麻처럼 얽혀 있는 이 세상 모든 문제의 원인과 책임이 전적으로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우리가 야기한 모든 문제로부터 우리를 살려 주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어 우리를 영육 간에 고쳐 주시고,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더욱이 오늘 주님께서, 주님을 찾은 사람들이 다 나음을 얻었다는 본문의 말씀으로 우리를 섬겨 주시기 위해 이 시간 우리 가운데 계심을 감사드립니다.
우리 모두 우리의 가슴에 손을 얹고 기도합니다. 병들고 연약한 우리의 영혼을 고쳐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이 어둔 세상 속에서 우리의 영혼이 샛별처럼 빛나게 하여 주옵소서. 세상의 의술이 고칠 수 없는 우리의 환부에 우리의 또 다른 손을 얹고 기도드립니다. 우리의 손을 주님의 손으로 덮어 주옵소서. 주님의 능력의 손으로 우리의 환부를 만져 주시어, 우리 모두 다 나음을 얻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를 고치시고, 우리를 살리시고, 우리를 섬기시기 위해 오신 주님!
오늘이 영적으로든, 육적으로든, 우리 모두에게 진정한 치유의 날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아멘.

 
 
 
* 여기에 실린 내용은 <사도행전 속으로> 제2권의 설교 가운데 한 편으로, 2006년 9월 24일 이재철 목사가 질병으로부터 자유하기를 바라는 이들에게 전한 메시지입니다. (이 소책자가 출간될 무렵 이재철 목사는 전립선암 수술을 받고 회복 중에 있었는데, 수술 전 한 성도로부터 이재철 목사 본인이 행한 이 설교 테이프를 선물받아 듣고 하나님의 큰 위로를 경험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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