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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오형탁
작성일 2012-12-21 (금)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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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 진주의노래 역자 윤기 이사장 인터뷰>
"이웃들의 나눔정신 바탕 복지사회 되어야”
“세계 고아의 날” 추진 윤기 목포 공생원 명예 원장
한겨레
 
윤기 이사장
 
 

“세계 고아의 날” 추진 윤기 목포 공생원 명예 원장

-한일이 나서 전세계 비정부기구 3000개가 힘을 합쳐 9백만명의 고아를 사랑으로 보살피겠다는 결의


-일본 사회복지법인 마음의 가족 이사장이자 윤학자 여사의 장남


-일본 사카이, 오사카 교토 고베 이어 도쿄에 2015년 재일동포 고령자들의 안식처 마음의 집 설립 추진


 


지난 10월31일은 일본인 여성으로 사랑과 희생의 정신으로 한국의 고아 3천여명을 길러낸 윤학자 여사 탄생 10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그가 56회 생일인 68년 이날 숨을 거뒀으니 2012년 10월 31일은 서거 44주년이 되는 날이기도 하다. 이날을 계기로 그가 염원한 고아 없는 세상의 뜻을 기리기 위해 ‘유엔 세계 고아의 날(UN World Orphans Day)’ 제정 추진 행사가 열렸다. 10월 31일 목포 대회에서 채택된 유엔 세계고아의 날 제정 청원 결의문엔 이런 대목이 있다.


”인간은 모두 고아입니다. 어려서 되느냐 어른이 되어서 되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11월 1일 서울에서의 100주년 행사를 끝내고 일본에 가기 전에, 그리고 윤 여사의 고향 고치에서의 100주년 행사를 마친뒤 11월 중순 다시 서울에 온 장남 윤기(71·일본명 다우치 모토이)씨를 두 번에 걸쳐 만났다. 11월 8~10일 고치에서의 행사에서는 탄생 100주년 기념식과 기존 윤 여사 기념비 옆에 흉상 제막식을 했다


숭실공생복지재단 명예회장이기도 한 그는 “어머니의 생일이자 기일인 내년 10월 31일을 ‘유엔 세계고아의 날’로 제정하는 것이 소망”이라고 말했다. 이제 한일의 학계 문화계 정계 시민사회단체 등을 망라한 윤 여사 탄생 100주년 기념사업회는 유엔 세계 고아의날 추진위원회로 탈바꿈 할 예정이다.


“세계적으로 부모 없는 아이는 900만명에 달합니다. 연약했던 제 어머니가 3000명을 키웠듯이 세계의 비정부기구 등 사회단체들 3000개가 힘을 합한다면 900만명의 고아들을 도울 수 있습니다.한일 양국의 1천여단체가 중심이 돼 아시아로부터 ‘고아’들 지원사업을 하려고 합니다. 북한을 우선적으로 고려하고 있습니다”


생전에 한국사회복지대학을 설립하고자 했던 모친이 당시 만든 설립취지서에는 고아 없는 사회를 만들겠다는 뜻이 담겨 있었으니 그 뜻을 이어받겠다는 것이다. 한일의 비정부기구들로부터 시작해 한국전 참전국가들과도 뜻을 모아서 내년 3월 안으로 뉴욕의 유엔 사무국에 청원서를 전달할 계획이다.


이 일을 시작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문제가 무엇이었는지를 묻자 뜻밖의 대답이 나왔다.“고아라는 말을 쓸 것인가가 제일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고아’라는 말에 담긴 편견 때문이었다. 고아들은 취직은 물론이고 결혼할 때도 자신의 과거를 숨길 수밖에 없다. 명절에도 갈데가 없다. 그래서 그는 이들이 함께 지낼 수 있는 정월 초하루의 날을 만들었고 가깝게 지내던 아동문학가인 고 윤석중 선생이 이들을 위해 노래를 만들어줬다고 한다. “낯이 설어 설인데 서러워서 설인데 우리에겐 설 날이다. 일어서는 설 날이다”


과거 고아원들이 아동복지시설로 이름을 바꿔 단 이유도 여기에 있다. “1년 동안 고민했지만 답을 못찾았습니다. 현실의 차별이 존재하는 한 말을 바꾼다고 현실이 바뀌지는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유엔도 세계 에이즈 고아의 날이라고 해서 그대로 쓰고 있습니다.”


그의 부친 윤치호(1909~?)는 목포시 호남동 18번지 허름한 초가에 둥지를 틀고 ‘나사렛 목공소’를 차린다. 목수로 거리의 전도자로 살아가던 윤치호는 19살인 1928년 불정대 다리 밑에서 우연히 만난 아이들을 데려와 함께 생활하기 시작했다. 윤치호의 삶은 2천 년 전 나사렛과 예루살렘을 걸었던 청년의 삶에 맞닿아 있었다.


“아버님은 13살 때 부모님이 다 돌아가시고 소년가장이었죠. 외국인 선교사와의 인연으로 신학교에 들어가 하나님을 믿게 됐죠. 목포에 와서 전도사 생활을 시작했는데 다리 밑에서 떨고 있는 아이들이 있어서 그 아이들을 데려가서 밥을 사주고 옷을 입혀주고. 헤어질 때 너희들 집이 어디냐고 물어 보니까 다리밑이라고 해서 그 7명의 아이들을 데려와서 같이 생활한 게 1928년 공생원의 시작입니다.”


  


 
 
 
지난 1938년 10월 15일 결혼식을 올린 윤치호와 윤학자(다우치 치즈코)의 모습. 공생복지재단 제공
다우치와 윤치호는 공생원 창립 10주년 기념일이던 1938년 10월 15일 결혼식을 올렸고, 그날부터 다우치는 윤학자라는 한국 이름을 하나 더 얻었다. 일본 시코쿠 지방 고치현에서 태어난 다우치 치즈코(田內千鶴子)는 조선총독부 하급관리로 목포에 온 부친을 따라 일본서 건너와 목포고녀를 졸업했다. 다우치는 목포의 선교사들이 세운 정명여학교의 음악교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일본의 저명한 목사·학자 모리야마 사토시는 최근 국내에서 번역된 <진주의 노래> (홍성사)에서 26살의 치즈코가 ‘목포 거지대장’ 윤치호·의 청혼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한 순간을 이렇게 썼다.


“저분은 내가 필요하다고 했다. 내가 아무 일도 못 하더라도 저분의 구혼을 그대로 받아들이자. 일본이 범한 수많은 범죄를 조금이라도 속죄하자. 설령 고난의 길이라 해도 공생원 아이들을 내 아이라 믿고 이들을 키우는 데 내 삶을 바치자.”


한국에서 윤학자 여사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남편은 일본경찰에 48번이나 구속되고, 6·25 때에는 인민군과 국군에 번갈아 체포됐다. 남편이 1951년 2월 식량을 구하러 갔다가 실종된 뒤에도 목포에 남아 아이들을 길렀다. 56회 생일인 68년 10월 31일 폐암으로 숨을 거두자 목포시민들은 한국 고아의 어머니라며 최초의 시민장으로 장례를 치뤘다.


어머니는 유언할 기력조차 없이 고이 누운 채로 고아들의 생일 축하 노래를 들으며 세상을 떠났다. 윤기 이사장은 가슴으로 어머니의 유언을 들었다. “기야, 아이들과 함께 아버지의 공생원을 잘 지켜다오.”


어머니 사후에 공생원을 이어 받은 그 역시 일본인 여성과 결혼하여 마치 부모의 일생처럼 살아가고 있다. 모친을 기억하며 쓴 그의 수기 <어머니는 바보야>에 따르면 그는 늦게 철이 들었다. 키도 유난히 작았다. 키를 물어보면 ‘등소평 만하다’면서 대충 넘어간다. 그러나 커갈수록 의젓해지고 단단해졌으며,어머니에겐 둘 도 없는 버팀목이 돼 줬다.


 


 
 
 
 
지난 10월 31일 목포 시민문화체육센터에서 열린 윤학자여사 탄신 기념 100주년 세계 고아의 날 제정 추진대회
그러나 26살의 젊은 나이에 부모에 이어 공생원 3대 원장에 취임한 그에게는 고아원 한 채와 320명의 고아, 수많은 빚이 남았다.


“저는 일본 동서대학 대학원에 입학한 실정이어서... 제 욕심같아선 공부를 더 하고 싶은데. 요즘 같으면 자격증 있느냐 경험 있느냐 해서 이사회에서 뽑았을 텐데, 하도 어려운 때라 장남이 해야 된다 해서 할 수 없이 맡았습니다.” 그러나 빚 때문에 한달 생활비보다 이자로 나가는 게 더 많고 생활도 힘들었다.


“친구들을 만나기 힘들었습니다. 고아들과 함께 사니 뭐 사과라도 하나 사들고 오려 해도 몇박스는 들고와야 하니 오기가 힘들었다고 합니다.” 모친은 돌아가실 적에 수첩을 하나 주며 어려울 때 이 분들을 만나면 도와줄 거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그는 이때부터 ‘움직이는 청구서’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동안 그는 많은 일을 했다. 누나, 동생들과 힘을 합쳐 공생원을 보육시설은 물론이고 재활 직업훈련 요양원 등 복지시설을 아우르는 사단법인 공생복지재단으로 키웠다. 1977년에는 최초 민간시설로 고아들의 일자리 창출을 위한 직업훈련학교인 서울시립소년소녀직업훈련원을 설립했고, 재활원, 장애인 요양원등을 운영하다가, 1982년 일본에 갔다. 일본에서는 재일동포를 위한 복지활동을 시작했고 1988년에는 사회복지법인 ‘마음의 가족’을 설립해 재일동포 고령자들의 안식처인 ‘고향의 집’을 운영하고 있다. 그는 ‘고향의 집’을 모금할 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여러 분의 마음으로 고향을 선물 할 수 있습니다”.


그가 일본에 가서 재일동포 노인들을 위한 복지시설 고향의 집을 만든 데는 사연이 있다.


“어머니가 편찮으셔서 병원에 입원했는데 일본 말을 하시더라구요. 어느날은 ‘우메보시가 다베타이(매실 장아찌가 먹고 싶구나)’라고 하셨습니다.” 늘 치마저고리를 입고 한국말만 하던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한 말이 일본말이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먹고 싶다던 음식도 고향 일본의 음식이었다. 우리네 재일동포 할머니 할아버지도 같은 마음 같은 생각이었을 것이다. 윤기 회장이 재일 동포 1세대 어르신들을 섬기는 복지시설 고향의 집을 설립하게 된 이유다.


그가 쓴 <어머니는 바보야>는 95년 한·일 합작 영화 ‘사랑의 묵시록’으로 만들어졌고 뒤에 일본의 <엔에치케이(NHK)>로도 소개됐다. 98년 오부치 게이조 당시 일본 총리는 이 프로그램을 보고 수시로 공생원에 전화를 걸어 격려했으며, 2000년엔 매화나무 20그루를 목포의 공생원에 보내기도 했다.


“운명적인 얘긴데요, 일본하면 잘 사는 나라. 재일동포 하면 부자들. 이렇게 생각했는데, 동포 한 분이 돌아가셨는데 13일만에 발견됐다 그래요. 일제 때는 나라 없어 끌려가서 고생하고 희생만 당하고. 전후에는 일본재건 복구에 노력을 했는데.... 남들은 돈을 벌어서 서울을 이웃처럼 다니고 있는데, 옆에 가족도 없고 이웃도 없고 울어주는 사람도 없이 다다미방에서 혼자 죽어갈 때 고향산천 생각하면서 부모형제 생각했지 않겠느냐. 과거는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이제 이 노인들의 한을 풀어줘야겠다. 적어도 일본 땅에서 한국인으로서 한국말을 하고 김치를 먹고 아리랑을 부를 수 있는.. 그런 양로원을 만들어 드리는 게 좋지 않겠느냐. 그러자 많은 이들이 동감을 해주고 과연 그럴 수 있다면서, 감동을 해서 참여한 사람들이 일본사람들입니다.”


 


 
 
 
지난 5월 중순 일본 도쿄 뉴오타니 호텔서 열린 윤학자 여사 탄신 100주년 기념 일본쪽 발기인 대회에 참석한 한국과 일본쪽 인사들. 앞줄 오른쪽에서 두번째가 오부치 게이조 전 일본총리의 부인.
그는 일본 땅에 한국인 양로원을 만들자고 호소했다. 84년 일본 <아사히신문>에 기고한 ‘재일 한국인 노인홈 건설을’이란 글을 통해 ‘진실은 통한다’는 걸 깨달았다. ‘빙점’의 작가 미우라 아야코. 수녀이자 작가 소노 아야코 등 일본의 많은 지성인들과 유도선수 야마시타 야스히로도 참여했다. 야마시타는 올림픽에서 항상 금메달 경쟁할 때는 한국인데 한국선수들 입에서는 김치냄새가 폴폴 나더라면서 역시 한국교포들은 나이들면 김치를 먹고 싶어할 거다라고 했다. 정계 제계 학계 종교계 연예계의 중요한 인사들이 적극 지원해 ‘재일한국인노인홈을 만드는 회’가 1984년에 11월 발족했고 회장에는 가나야마 마사히데 전 주한일본대사가 취임했다. “이러한 분들의 마음을 움직인 건 공생원을 홀로 지킨 윤학자 여사를 그린 영화 ‘사랑의 묵시록’이었습니다.“


1만3000여명의 일본 시민들이 참여해서 1989년 오사카시 근교의 사카이시에 만들어진 게 고향의 집이다. 그 뒤 오사카, 고베. 교토 네군데 그리고 2015년을 목표로 도쿄에도 고향의 집이 건립된다. 일본 사람과 재일동포의 후원으로 김치를 먹고, 아리랑이 흘러나오는 홀에서 춤을 추며, 따뜻한 온돌방에서 편히 쉴 수 있는 재일 한국인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노후를 보낼 수 있는 고향의 집 10개를 짓는 게 그의 또 다른 꿈이다.


26살의 청년 윤기는 이제 일흔을 넘어선 노인이 됐다. 한일 양국을 오가며 사회복지사업을 이어갔으니 40년은 목포, 30년은 일본에서 산 셈이다. 그의 직함은 공생복지재단 명예회장, 재일코리아 고령자 생활지원 네트워크 하나 공동대표, 일본 사회복지법인 마음의 가족 이사장 등 여럿이다. 그러나 평생 직업은 하나 사회복지사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복지국가 공약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데 대해 그는 이렇게 말했다.


“복지국가가 아니라 복지사회가 돼야 합니다. 국가가 복지 문제를 다 책임지려 한다면 재정은 파탄나고 말 것입니다. 시민들이, 이웃들이 나서서 나눔의 정신으로 함께 하는 복지사회가 돼야 합니다. 국가는 그런 사회가 될 수 있는 버팀목이 되고 지원하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글·사진/ 강태호 기자 kankan1@hani.co.kr





 
 
<진주의노래 / 모리야마 사토시 作/ 윤기 易/ 홍성사 刊/ 1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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