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긋기
작성자 김기민
작성일 2012-02-03 (금) 10:12
ㆍ조회: 17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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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성의 끈을
 
마지막 희망, 뇌수술
 
2005년 3월, 은총이의 경기는 나날이 횟수와 시간이 늘어만 갔습니다. 뇌는 석회화가 더 깊숙이 진행되고, 손과 다리는 점점 더 굳어가고, 잦은 무호흡으로 뇌손상도 심해졌습니다. 은총이 같은 희귀병 사례가 흔치 않아서 원광대학교병원에서 은총이를 담당하셨던 이창우 교수님은 논문을 쓰셨습니다. 그 논문은 의사선생님들만 보는 〈초록〉 지에 실렸습니다. 이창우 교수님의 후배인 강훈철 교수님이 논문을 보시고 연락을 주셨다고 합니다. 은총이의 수술에 대해 의논해 보자고요. 이 교수님은 은총이가 조금 괜찮은 날 상계백병원에 가보라고 하셨습니다. 이미 큰 병원에 가서 뇌수술에 대해 알아봤지만 뾰족한 답을 주지 않아 절망만 안고 돌아온 터라 별 기대는 하지 않았습니다.
 
일전에 우리나라 최초로 대뇌반구절제수술에 성공한 서울의 어느 유명 병원에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은총이 같은 스터지-웨버 증후군 아이를 둔 부모들이 많이 찾는다고 들었습니다. 스터지-웨버 증후군 아이들을 많이 접하며 수술도 해본 교수님이라면 우리 부부에게 뚜렷한 답을 줄 것 같았습니다. 복잡한 절차를 거쳐 진료 예약을 한 후 최근에 찍은 은총이 CT 사진과 소견서를 가지고 찾아갔습니다. 유명하신 선생님이라 그런지 오래 기다린 끝에 차례가 되어 진료실로 들어갔습니다. 우리가 만나려 한 교수님 외에 다른 의사선생님 세 분이 더 계셨습니다. 빠르게 은총이의 자료를 검토하는 모습이 프로다워 보였습니다. 교수님은 다짜고짜 궁금한 게 뭐냐고 물으셨습니다. 우린 “경기를 자주하는 은총이에게 수술하는 게 도움이 되나요?”라고 가장 궁금한 점을 질문했습니다. 교수님은 “계속 진행되는 병인 데다가 은총이한테는 수술해도 좋아진다고 장담할 수 없고, 최악의 경우 식물인간 상태이니 결정은 부모가 해야 해요”라는 대답만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또 궁금한 게 뭐냐고 하시더군요.
인터넷에 제대로 정보가 나와 있지 않은 클리펠-트레노우네이-베버 증후군에 대해 알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다른 의사선생님이 엄청 두꺼운 의학 서적을 펼치더니 한 아이의 사진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 사진 속 아이는 은총이보다 더 어린데 한쪽 다리는 성인의 다리만 한 길이와 굵기였습니다. 쉽게 말해서 한쪽 다리는 아이 다리인데 한쪽은 코끼리 다리 같았습니다. 우리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다리 굵기가 조금 차이가 나 보이는 은총이가 나중에는 이렇게 되는 병이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물어보았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요?”
“재수 없었다고 생각하세요.”
“저희는 멀리 군산에서 왔어요. 병에 대해 자세히 알려 주세요.”
“멀리 부산에서도 오시니 더 궁금한 게 있으면 다음 외래를 잡으세요.”
흰 가운을 입은 세 분의 의사는 이미 다음 환자의 차트를 펼쳤습니다. 이렇게 5분도 안 되는 외래 진료가 끝났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이 분야의 수술을 한 교수님이고, 많은 환자들이 아이를 고치려고 찾는 선생님인데,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은총이를 낳은 게 ‘재수 없었다’라고 생각하라니……. 우리가 얼마나 사랑하는 아이인데, 어떻게 이런 말을……. 아파 본 사람만이 남의 아픔을 이해하고 어루만질 수 있다는 생각에 억울하기도 하고 화도 났습니다. 의사선생님의 흰 가운이 그렇게 높아 보일 수 없었습니다. 아픈 아이를 둔 것이 마치 죄인인 것처럼 두려움마저 들게 한 그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았습니다.
 
지금 뇌수술에 대한 권유를 받으면서 그때 일이 떠올랐습니다. 매일 무호흡과 싸우는 은총이를 이대로 둘 수 없기에 마지막 희망이라 생각하고 상계백병원을 찾았습니다. 그때 병원비로 무척 힘든 때였는데 감사하게도 기독교방송 CTS의 〈예수사랑 여기에〉라는 방송에 보낸 사연이 채택되어 금전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뇌수술을 하면 예후가 안 좋아서 다시 경기를 하거나 혹여 식물인간으로 누워 지낼 수도 있다는데 이 병원에서 제발 그 소리만 안 듣게 해달라고 마음속으로 기도하고 또 기도했습니다.
의사선생님은 아주 밝은 얼굴로 저와 은총이를 맞아 주셨습니다. 처음 보자마자 “왜 이제 오셨어요?”라며 나무라셨습니다. 초면이지만 선생님의 이 말이 조금도 기분 나쁘지 않았습니다. 나무라는 어투인데도 다른 선생님과 다른 친근감이 느껴졌습니다.
“수술하면 좋아질 애를 왜 이렇게 고생시켰어요? 당장 입원시키세요.”
“정말 수술해 주실 거예요? 진짜 수술하면 좋아져요?”
이 선생님은 무슨 자신감으로 그렇게 말씀하시는 건지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이 병원보다 더 큰 병원에서도 우리 은총이는 해줄 게 없다며 운이 없다고 여기라 했는데 이분은 무슨 믿음으로 다짜고짜 입원시켜서 수술하자고 하시는지, 제 귀가 의심스러웠습니다. 다시 조심스럽게 여쭈었습니다.
“대뇌반구절제수술은 비용이 많이 든다는데 얼마 정도예요?”
“수술 시켜줄 테니 돈 없으면 밤에 도망가세요. 지금 수술 안 시키면 은총 엄마는 엄마도 아니에요.”
저는 선생님에 대한 깊은 신뢰감이 생겼습니다. 은총이가 수술받은 후 잘못되어 식물인간이라도 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은 눈곱만큼도 들지 않았습니다. 교수님과의 짧은 대화 속에서 하나님이 은총이를 위해 보내 주신 선생님이라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당장 입원하기로 하고 은총이와 병원을 나왔습니다.
피디님이 제게 물었습니다.
“선생님이 수술하면 좋아진다고 하셨는데 왜 여태 안 하셨어요?”
“여러 병원을 다녀봤지만 은총이를 수술해 준다는 병원이 없었거든요. 식물인간으로 살 거라거나 재수 없게 태어난 아이라고 생각하라는 심한 말만 들었어요.”
제 말을 들은 피디님도 강 교수님이 정말 무얼 믿고 저렇게 확신에 찬 말씀을 하시는지 대단한 분 같다고 하시더군요. 저는 마음속으로 ‘무조건 감사해요. 무조건 감사해요’라는 말만 되풀이했습니다. 이 기쁜 소식을 전하고자 은총 아빠에게 바로 전화를 했습니다. 은총 아빠는 선생님이 진짜 돈 없으면 도망가라고 하셨냐고 묻고는 얼마나 자신 있으면 그런 말을 하셨겠냐며 “진짜? 진짜?” 하고 거듭 신기해했습니다.
정말 저희가 은총이 수술 받고서 돈 없다고 도망가지는 않겠지만 그렇게 말해 주신 교수님이 너무나 고마웠습니다. 수술 결과에 대해 불안한 마음이 조금도 들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지체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당장 수술하자는 결정에 따르고자 짐을 쌌습니다. 사실 은총이를 입원시키려고 짐을 꾸리는 건 정말 힘든 일입니다. 일상이 된 일이지만 번번이 슬픈 마음이 차오릅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기쁘게 짐을 쌌습니다.
수술하면 은총이의 경기가 사라지고 편히 숨 쉬며 잘 수 있을 거란 소망이 생겼습니다. 3월 23일 입원해서 수술 전 검사를 했습니다. 뇌파 검사, CT 촬영, 혈액 검사 등. 경기가 치료되면 얼마나 좋을까요? 은총이가 자다가 숨을 안 쉴까 봐 은총 아빠와 둘이 번갈아가며 자는 은총이를 살피지 않아도 되고, 뇌손상도 더 이상 염려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기대가 되고 기다려졌습니다.
그런데 24일 아침에 갑자기 예정에 없던 수술을 해야 한다면서 간호사님이 은총이를 금식시키라고 했습니다. 어제 검사해 보니 왼쪽 뇌에 출혈이 있었다는 겁니다. 얼마 전 텔레비전에서 뇌출혈이 생기면 망치로 머리를 맞는 고통이 따른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이 미련한 엄마는 아들이 그 엄청난 고통을 견뎌오고 있던 것조차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겁니다. 수술 날 은총 아빠가 오기로 해서 지금은 은총이와 단둘이 있는데 갑자기 수술이라니, 은총이도 무서웠겠지만 저도 떨리고 무서웠습니다. 그렇게 은총이는 생각지도 못한 수술을 서둘러 받았습니다.
수술 시간 내내 아들이 겪은 큰 고통을 눈치 채지 못한 자신을 원망하고 또 원망하며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습니다. 다행히 생각보다 수술 시간은 길지 않았습니다. 은총이는 머리에 투명한 주머니 같은 것을 달고 나왔는데 무척 힘들어 보였습니다. 칭칭 붕대를 감은 머리에는 링거 줄 모양의 연결된 관에 동그란 주머니가 달려 있고 그곳에 피가 고여 있었습니다. 이 어린 것이 얼마나 무섭고 아팠을까 생각하니 가슴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은총아, 미안해. 은총아, 미안해.”
말을 건네면서 울지 않으려고 꾹 참았습니다.
아이 앞에서 울지 않기로 은총 아빠와 약속했는데 오늘은 절대 그 약속을 못 지킬 것 같습니다. 은총이는 퉁퉁 부은 눈으로 절 위로하듯 눈을 맞춰 줍니다. 은총이는 그렇게 뇌출혈 수술을 저와 단둘이 있을 때 했습니다. 함께하지 못한 미안함에 혼자 소리 내어 울었을 은총 아빠를 생각하니 또 가슴이 미어집니다.
예정보다 조금 늦어졌지만 28일 드디어 대뇌반구절제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아침 7시, 뇌출혈이 있던 자리가 다 아물기도 전에 머리에 붕대를 감은 은총이는 또 수술실에 들어갔습니다. 은총이의 수술을 맡으신 분은 신경외과 황용순 교수님입니다. 황 교수님은 강 교수님과 같이 긍정적인 말씀으로 저희에게 희망을 주셨습니다. 신경외과 선생님들은 수술 동의서 쓸 때 최악의 경우를 설명하시는데 은총이는 잘 될 거라고 용기를 주셨습니다.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상황에서 수술을 시켜 준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한데 저희에게 용기와 희망까지 주시니 얼마나 힘이 됐는지 모릅니다. 수술 대기실 침대에서 은총이와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은총이 곧 수술하러 가요. 지금 배가 많이 고픈데 수술 잘 받고 밥 먹게 해주세요. 무섭고 두렵지 않게 은총이 손 꼭 잡아 주세요!”
담담한 얼굴로 은총이를 수술실로 들여보냈습니다. 수술실 입구의 문이 닫히자 솟구치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서로 얼굴을 보면 더욱 슬픔이 크겠기에 어머님과 저는 눈도 안 마주치고 각자 등을 돌리고 걸었습니다. 안 봐도 압니다. 얼마나 굵고 진한 눈물을 흘리실지…….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수술 대기실 앞에 앉아도 있어 보고, 중환자 보호자대기실에 누워 있어도 보고, 복도를 서성여 보기도 했지만 초조한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무조건 기도만 했습니다.
“하나님, 은총이 무섭지 않게 손 꼭 잡아 주세요.”
길고 긴 하루가 가고 밤 11시에야 은총이의 수술이 끝났습니다. 그 검붉은 얼굴은 얼마나 피를 흘렸는지 창백하다 못해 하얗고, 이전보다 훨씬 많이 부은 얼굴인 데다 여러 개의 링거 주사를 맞으며 수혈도 받고 있는 은총이……. 이제 17개월 된 작은 아기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가혹한 시간이었습니다.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요?
수술이 잘 되었는지 확인 차 CT를 찍고 바로 신경외과 중환자실로 옮겼습니다. 중환자실 문 앞에서 대기하라고 하기에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잠시 정리하고 부른다고 했건만 은총이의 침대가 그대로 다시 나오는 게 아닙니까! CT 촬영 결과 수술한 부분에 뇌출혈이 생겨 다시 수술해야 한다는 겁니다. 정말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서 다시 수술실에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황 교수님은 제 어깨를 두드리며 “금방 나올 테니 걱정 말고 기도하고 있어요” 하시고 다시 수술실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때는 정말 어찌할 바를 몰라 눈물도 안 났습니다.
12시가 조금 넘어 은총이는 다시 중환자실로 돌아왔습니다. 교수님의 배려로 중환자실 안쪽의 작은 방에서 은총이와 함께 있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열일곱 시간이 넘는 은총이의 수술은 감사하게도 성공적이었습니다.
 
<우리 은총이> 중에서
 
 
긍휼은 상대를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이는 감정적인 면에서 바라본 풀이이고,
이성의 눈으로 보자면, 긍휼이란 상대에게서 '가능성'의 끈을 놓지 않는 것입니다.
상대가 누구이든, 어떤 상황에 놓여 있든 말입니다.
사랑이란 긍휼이 이 사투를 벌이며 흘리는 피일 것입니다.
가능성은 죽어도 있습니다.
그에게도, 나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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