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클래식 음악에 주눅 든 당신에게
잊어버릴 만하면 한 번씩 노래방에 간다. 관계유지는 해야겠기에 어쩔 수 없이 따라 가는 것이다. 내가 노래방 출입을 꺼리는 이유는, 거기가면 없는 스트레스까지 생기기 때문이다. 노래방이 더 싫은 것은 누구든 함께 망가지며 놀아야 한다는 그 일방적인 강요 분위기다. 어떻게 노래방에만 가면 진보, 자유, 개성, 소수의 인권보호를 운운하던 사람들조차도 그렇게 쉽게 다름을 인정치 않는 ‘파쇼’로 돌변하는지 나는 모르겠다. 내가 노래방을 기피하는 또 다른 이유는 처음부터 끝까지 아는 노래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가사가 얼추 생각나면 제목을 모르겠고, 곡의 중요한 부분을 알면 나머지 멜로디가 생각나지 않기에 부를 곡이 없는 것이다. 노래방을 처음 따라갔을 때, 나는 가요쯤이야 쉽게 따라할 수 있을 줄 알았다. 내가 알고 있는 가수들과 그들이 유행시킨 노래가 우리 가요의 전부이겠거니 생각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웬걸, 지인들이 부르고 또 불러도 동이 나지 않는 가요에 나는 적잖이 놀랐다. “나는 대체 뭐하며 살았기에 이런 노래들을 몰랐을까” 싶을 정도로 좋은 곡들도 꽤나 많았다. 그러나 노래방에서 더 놀랐던 것은 그렇게 쉽게만 알았던 가요들이 가지고 있던 섬세한 리듬이었다. 노래 가사의 맛과 멋을 절묘하게 살려내는 우리 가요의 리듬감에 나는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지인들이 부르는 노래의 리듬을 머릿속 악보에 옮겨 적으며 나는 탄성을 질렀다. 가요가 쉽고 단순하다는 것은 깨져야 하는 내 편견일 뿐이었다. 신기하게도 그렇게 복잡하고 섬세한 리듬을 가진 노래를 악보 한 번 본 적이 없는 게 분명한 내 아내나 친구들이 멋들어지게 불러댔다. 물론 그들 중에는 평소 음악적 재능을 가진 사람도 없지 않았지만 더 많은 친구들은 그저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충격이었다. 명색이 음악을, 그것도 지휘를 전공했기 때문에 악보만 있으면 무슨 노래든 부를 수 있는 나는 할 줄 아는 노래가 없어 곡목 리스트가 담긴 책만 뒤적이고 있을 때 비전공자들인 저들은 펄펄 날았다. 나는 그때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악보를 읽을 줄 모르는 것도 문제지만 악보 없이는 노래를 부를 수 없다는 게 더 큰 문제라는 사실을, 악보 없이는 아무 노래도 할 수 없는 나는 음악적 불구자란 사실을 말이다.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는 클래식 음악을 즐기는 것이 고상한 취미라는 확신이 강고하다. 어떤 사람의 클래식 음악에 대한 이해는 종종 그 사람의 교양을 재는 척도가 되기도 한다. 표 나게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은 진보적인 지식인들 가운데서도 많은 사람들이 클래식 음악에 대해 주눅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다. 이런 사람들은 클래식 음악이 길고 지루하고 어렵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음악을 즐기는 타인을 인정하는 것이야 바람직한 일이겠으나 클래식 음악에 대한 이해를 교양의 척도쯤으로 생각하여 주눅이 드는 것은 문제다. 글줄 꽤나 읽은 사람들조차 클래식 음악에 주눅드는 것은 저들의 교양에 대한 잘못된 이해와 허영심 때문이다. 경험에 의할 때, 클래식에 주눅 든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음악 그 자체가 아니라 사람들의 이목이다. 저들은 클래식 음악을 통하여 일상이 즐거워지는 게 아니라 클래식 음악을 이만큼 많이 알고 있다는 사실을 과시하고 싶어 한다. 때문에 엄청나게 비싼 외국 유명 연주자의 내한 공연에 기를 쓰고 모습을 드러낸다. 이런 사람들이나, 자신의 처지 때문에 상류 사회들을 따라 하지는 못하지만 그런 걸 멋지다고 생각하는, 이름 하여 클래식 음악에 주눅 든 사람들의 관심은 언제나 자기가 아니라 타인이다. 자기의 음악적 취향에 충실한 대신 보다 유식해 보이는 음악을 쫓는 것이다. 저들의 허영심이 가장 극명하게 나타나는 것은 고가 오디오나 5.1 채널 따위의 수입 영상기기에 대한 집착이다. 물론 매우 비싼 음악회를 자주 찾는 상류 사회 인사들이나 수 억 원 대의 고가 오디오를 가진 사람들이 모두 클래식 음악에 무식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서민보다는 상류 사회 사람들 중에 클래식 음악에 푹 빠진 마니아들이 더 많은 것이 사실이다. 때문에 이 글의 의도는 그렇게 분명한 통계적인 사실을 부인하자는 게 아니다. 종종 찾는 유명 외국 연주자의 음악회장이나 자기가 주워섬길 수 있는 클래식 음악의 상식, 또는 집에 설치한 고가 오디오를 통해 자기의 교양이나 신분을 과시하려거나 그런 것을 멋있다고 생각하는 태도가 클래식을 어렵고 지루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지적하고자 할 뿐이다.
어떻게 하면 클래식 음악에 대한 주눅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가장 중요한 것은 남들에게 과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즐겁기 위해 음악을 듣는 것이다. 음식의 맛을 느낄 때 그 음식의 이름이 무엇이고, 어떤 재료가 들어갔고, 조리방법이 어떤 지를 먼저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별 기대 없이 입에 넣은 음식이 맛있을 때 우리는 음식의 이름이며 재료며 조리방법을 비로소 궁금해 한다. 어떤 경우는 음식 맛에 푹 빠져 음식 이름을 알아보는 것조차 잊을 때가 있다. 클래식 음악도 마찬가지다. 중요한 것은 그 음악이 내게 주는 즐거움이지 그 곡의 작곡자나 곡의 제목을 아는 게 아니다. 그 곡에서 얻은 즐거움의 크기는 그 곡에 대한 관심과 정확하게 정비례한다. 어떤 곡이 감동적이면 감동적일수록 그 곡에 대한 모든 것이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마치 자기가 좋아하는 스타의 모든 것이 궁금해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반면에 클래식에 주눅 든 사람들은 뛰어난 작곡가의 유명한 작품에 목을 맨다. 그 곡에 감동을 받지 못하면 부끄러워한다. 이러다 보니 클래식 음악이 어렵고 지루해지는 것이다. 내가 아는 한 클래식 음악에 주눅 든 사람들조차도 대중음악을 즐길 때는 그렇지 않다.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를 눈치 보지 않고 즐기는 것이다. 물론 대중음악 내에서도 뽕짝보다는 발라드나 재즈를 고급스럽게 여기는 서열화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 대다수 사람들도 그 점을 인정하지만 서열화 때문에 자기의 취향을 포기하거나 숨기지는 않는 듯하다. 나는 노래방에서 양희은이나 송창식을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설운도나 송대관의 노래를 좋아한다고 주눅 드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유홍준의 말이 유명세를 타니 『그림 아는 만큼 보인다』는 책까지 베스트셀러가 되는 걸 보았다. 그림에 있어서 그 말이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는지 모르겠으나 음악에 관한 한 ‘아는 만큼 들린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음악은 듣는 만큼 들린다. 아는 것이 어떤 음악에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부인할 필요는 없다. 그 곡이나 작곡자, 또는 녹음 방식이나 연주자에 대한 지식은 어떤 곡에 호감을 가지게도 하고 반감을 갖게도 하니까 말이다. 그러나 마부가 물가로 인도할 수는 있으나 말에게 물을 먹일 수는 없듯 음악에 대한 지식 또한 그렇다. 음악의 지식을 갖는 것과 듣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들으면 들을수록 취향은 세련되어지고 자신의 몸이 원하는 음악에 민감해지게 된다. 유명한 곡을 내가 반드시 좋아해야 한다는 법은 그 어디에도 없다. 좋아하는 음악에 대한 기준은 평론가나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다. 음식의 맛이 그렇듯 자꾸 듣다보면 좋아하는 음악 또한 변한다. 그 변화가 때로는 발전을 의미하기도 하고, 때로는 취향의 변화를 의미하기도 한다. 나이를 먹음에 따라 신 맛을 싫어하던 사람이 좋아질 때가 있는 것처럼 트로트나 모차르트가 재미없던 사람이 어느 날 저들의 음악이 살갑게 다가오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변화는 다른 사람의 이목과 체면을 과감히 버릴 수 있는 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행복이다. 추신: 저는 그 동안 월간 <인물과 사상>에 심층 인터뷰 기사를 기고하였습니다. 이 글은 저의 본업이라 할 수 있는 음악 관련글로 <인물과 사상>과 새로 인연을 맺기 시작한 글이라 애정이 가는 글입니다. 이 글은 2007년 1월호에 게제되었습니다. |
|
이재원
2007-03-10 01:15
|
대학 진학을 위해 음악을 공부했고, 시험을 위해 수학공식 외우듯 이론을 공부해온 제게 클래식은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먼 당신'이었습니다. 그러나 보니 어색하고 어려워 지고.. 그러던중 전문가에 의한 전문가들을 위한 책이 아닌 클래식 레코드 가게 주인이 들려주는 초심자를 위한 친절한 안내서와 그 속에 담긴 음악을 만든이들의 삶은 클래식과 친해지는데 결정적 계기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제게 있어 클래식에 대한 주눅은 어쩌면 수학보다 어려운 오선지와 음표 그리고 잘 나오지 않는 음악성적 이었던것 같습니다. 이제 걸음마를 시작하며 클래식을 듣기 시작했을 즈음에 도사님의 글을 읽으며 클래식에 대한 편안한 즐거움이 한결 더해 지는듯 합니다. 도사님, 오늘 저녁도 맛이겠게 먹었고 좋은 이야기 감사드리고 이렇게 글까지 올려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 |
|
|
지유철
2007-03-10 02:53
|
아까 말씀드린 책의 제목은 이용숙의 <지상에 핀 천상의 음악>(샘터)입니다. 편안하게 읽을 수 있는 내용입니다. 성가대가 없는 교회가 없는 게 한국교회이고, 한국 음악 연주자의 축소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한국 교회의 그 많은 지휘자, 솔리스트, 피아노 및 오르가니스트가 있지만 종교 음악에 관한 읽은 만한 책은 거의 전무하네요. 이 책의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본문 속의 원어, 생몰 연대, 한문 표기였습니다. 산문답게 편하게 지나가면 좋았을 것을 너무 친절하게, 또는 너무 음악적 지식을 강요한다고 생각하니 좀 거슬리더군요.^^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