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씨 451도, 망각의 바다를 기웃거리며

화씨 451도, 망각의 바다를 기웃거리며

요코하마 트리엔날레(www.yokohamatriennale.jp, 8.1~11.3)에 다녀왔다. 이번 트리엔날레의 주제는 ‘화씨 451의 예술: 세계의 중심에는 망각의 바다가 있다’. 광주비엔날레를 비롯한 유수의 국제 미술제가 묵직한 주제를 중심으로 현대 작가들의 치열한 문제의식과 고민의 자취를 담아내는데, 이 미술제는 올해의 주제부터 자못 궁금함을 자아낸다. 웬 ‘화씨 451’? 아는 분도 계시겠지만, 미국 작가 레이 브래드버리(1920-2012)의 SF소설 《화씨 451도》의 책 제목에서 딴 것이다.(화씨 451도는 책이 불에 타기 시작하는 온도로, 섭씨 약 233도에 해당한다.) 출간된 지 60년도 넘는 이 책은 책이 모조리 불태워지는 미래 사회를 다루는데, 작가는 귀중한 것이 망각되어가는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한, 예언에 가득 찬 경고를 발하고 있다.

‘언모뉴멘털 모뉴멘츠(Unmonumental Monuments)’, ‘세계의 중심에는 무엇이 있나?’, ‘침묵과 속삭임에 귀 기울이다’, ‘홀로 세상과 격투하는 중노동’ 등등 녹록지 않은 주제와 많은 작품들 가운데 특별히 눈에 띄는 코너에 책을 다룬 작품들이 있다. 그 가운데 하나는 <타지 않는 이야기>라는 제목의, ‘세상에 존재하는 단 한 권의 책’이다. 이 전시를 위해 특별히 장정·제본된 커다란 판형의 이 책에는 스탈린 정권 아래 구전으로 남은 한 작가의 시, 러시아 희곡 작가의 작품 등 8편의 텍스트가 실려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작품들이 다른 곳으로 옮겨지고 텅 빈 에르미타주 미술관을 그린 소묘와 우리나라 작가 김용익을 비롯한 몇몇 작가들의 회화 작품도 실려 있다. 모두 ‘망각’이라는 주제에 관한 내용들로,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렸다가 이 책을 ‘열람’했다. 전시 기간 중에 부정기적으로 이 책의 낭독회도 열렸는데, 놀랍게도 이 특별한 책은 전시 마지막 날 저녁 이른바 ‘소멸 퍼포먼스’에 의해 불태워지면서 ‘망각의 바다에 이른다’고 한다.(이 퍼포먼스를 보지 못하고 귀국하게 되어 몹시 아쉬웠다.)

‘화씨 451도’라는 또 다른 작품도 보는 이들을 자못 어리둥절케 한다. 실제 소설 《화씨 451도》의 일어판 페이퍼백으로 만든 책을 쌓아 놓은, 일종의 설치미술이다. 그런데 활자가 뒤집혀 있다! 관람객은 자유롭게 책을 볼 수 있지만 정작 읽기는 극히 힘들다. 감상자와 작품 및 공간성의 관계를 돌아보게 하는 이 작품은 커뮤니케이션에 내재한 불가능성과 함께 언어를 초월한 영역에서의 상호이해에 근본적인 의문을 던진다.

전시 마지막 코너에서는 ‘망각의 바다를 표류하다’라는 주제의 다채로운 설치미술들이 소개되는데, ‘망각의 바다를 지나 우리가 이르는 곳은 어디일까’가 화두로 제시되어 있다. 분서갱유(焚書坑儒)보다 무서운 속도와 양상으로 온갖 소중한 것들이 망각의 블랙홀에 속절없이 던져지는 오늘날, 화씨 451도를 넘어서고 망각의 바다 너머 깨어 있는 영혼의 불을 밝힐 책을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는다.

 _송승호(홍성사 편집주간), 들소리신문 201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