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근간, 투투 신부님의 책에 대하여

1989년 성탄절에 나는 성지를 방문했고, 그 기간 동안 예루살렘의 야드 바솀 홀로코스트박물관을 찾는 특권을 누렸다. 언론에서 내게 소감을 물었을 때, 나는 정말 가슴 아픈 경험이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유대인이셨던 내가 섬기는 주님은 이렇게 물으셨을 거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용서는 어떻게 되었느냐?”

이 말은 뜻밖의 소란과 가차 없는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나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당하는 부당한 대우에도 불쾌함을 표시했다. 내가 볼 때 그런 대우는 유대인 선지자들의 가르침과 기독교인들이 주님으로 따르는 유대교 랍비가 그 추종자들에게 요구한 바와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나는 반(反)유대주의자라는 비난을 받았고, 내가 머물렀던 예루살렘 세인트조지 성공회대성당 벽에는 이런 낙서가 등장했다.

“투투는 흑인 나치 돼지이다.”

따라서 나는 1999년 1월에 다시 예루살렘을 찾으면서 다소 걱정스러웠다. 나는 [팔레스타인] 서안지구의 한 성공회 교회에서 설교를 하고 예루살렘의 한 모임에서 강연을 한 뒤, 내가 이사로 있는 페레스평화센터의 텔아비브 모임에 참석하기로 되어 있었다. 나의 걱정은 부질없는 것이었음이 곧 드러났다. 예루살렘에서 열린 모임은 주최 측이 사람들을 돌려보내야 할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 남아공에서 벌어진 일이 사람들을 크게 감동시켰음이 분명했다. 이스라엘 수상과 외무장관을 역임한 노벨평화상 수상자 시몬 페레스는 남아공의 화해의 과정을 역사상 유일무이한 쾌거라고 불렀다.

예루살렘의 모임 장소를 가득 채운 이스라엘 사람들은 진실화해위원회의 활동 및 용서와 화해의 개념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나는 이런 주장을 펼쳤다. 우리는 남아공에서 참된 안보란 총부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님을 배우게 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소중히 여기는 지역, 중동의 참된 안보는 이곳의 모든 거주자들이 자신의 인권과 존엄성이 존중받고 있다고 믿을 때, 참된 정의가 지배할 때 찾아올 것이다. 나의 관점은 달라지지 않았다. 중동에는 용서가 필요하며, 이스라엘 국가에는 안보가,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는 정의와 평등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이스라엘 사람들은 나를 새롭게 보았다.

남아공이 걸어간 화해의 길이 르완다, 북아일랜드, 이스라엘, 팔레스타인에 사는 사람들이 내 말을 신빙성 있게 받아들이도록 한 게 분명했다. 사람들은 내가 거북한 이야기를 해도 주제 넘는다거나 무신경하다고 비판하지 않고 들어주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내 말에 귀를 기울인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남아공에서 시도했던 일에서 희망을 얻은 듯 보였다는 사실이었다. 우리에게 위험을 감수할 각오가 되어 있는 지도자들이 있었던 것은 축복이었다. 용서를 청하고 베푸는 일은 곧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다.

개인관계에서도 다른 사람에게 용서를 구할 때 퇴짜를 맞을 수 있다. 상처를 받은 사람이 우리를 용서하기를 거절할 수도 있다. 상처 입은 사람이 용서를 하고자 하는 경우엔 위험이 더 커진다. 잘못한 사람이 오만하고 완고하고 분별력이 없어 사과할 준비도 안 되어 있고 용서를 구할 의향마저 없을 수도 있다. 그런 사람은 용서를 고마워하지 않는다. 그런 거절의 태도는 용서의 시도 전체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 남아공 지도자들은 자백, 용서, 화해의 길을 걸어가겠다고, 그 길에서 만날 위험을 감수하겠다고 말했다. 불가피해 보였던 재난이 남아공을 덮치지 않았던 것으로 보아 그들의 도박은 수지가 맞았던 듯하다.

누군가의 잘못으로 인간관계가 훼손되거나 이후의 관계가 불가능하게 된 경우, 잘못한 사람이 과실을 인정하고 기꺼이 사과하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것은 용서와 화해의 과정에 엄청난 도움을 준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쉽지 않다. 자신이 틀렸다는 사실을 인정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우리 모두 잘 안다.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언어권에서 가장 어려운 말은 “미안합니다”이다. 따라서 끔찍한 일을 저질렀다는 의심을 받는 사람들은 물론, 그들이 속한 집단도 거의 언제나 그들이 범죄의 가능성 자체를 한사코 부인하고 나선다. 이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범죄자들은 그들이 저지른 잔학행위가 그들이 속한 집단을 위해 필요한 일이었다고 믿는다. 그들은 사실부인으로 일관하고 그런 일은 벌어진 적도 없다고 주장한다. 부정할 수 없는 증거가 나타나면, 몰랐다는 핑계 뒤로 숨는다. 독일인들은 나치가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지 몰랐다고 주장했다. 남아공 백인들도 몰랐다는 주장을 피난처로 삼으려 했지만 전 아파르트헤이트 각료 레온 베셀스는 그들은 알고 싶지 않았던 것뿐이라고 말했다. 그의 말이 진실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들에게 경고하려 애쓴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구금 도중에 불의의 죽음을 당한 사람들의 기록들이 있었다. 들을 귀가 있는 사람들에게는 불편하고 소름끼치는 이야기들이 있었다. 그러나 [귀 막고 눈 막고 입 막은] 세 마리 원숭이 조각상처럼, 그들은 악에 대해 듣지도 보지도 말하지도 않는 쪽을 선택했다. 범행을 자백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우리는 명령을 수행했을 뿐입니다”라는 말로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떠넘겼다. 그들은 각 개인이 도덕적인 책임을 져야 하는 존재이며 부당한 명령을 수행한 책임 역시 져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우리는 대개 자신의 약한 부분과 악함을 쉽사리 드러내지 않는다. 그러나 용서와 치유의 과정이 성공하려면,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그 잘못을 인정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정말 곤란한 상황에 이르게 된다. 가해자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은 사태의 진상을 파악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하다. 부부가 말다툼을 했는데 잘못한 쪽이 잘못을 인정하여 불화의 원인을 드러내지 않으면, 아무리 남편이 귀가할 때 꽃다발을 사들고 오고 부부가 아무 일도 없는 척해도, 그들은 언젠가 갑자기 충격적인 상황을 맞게 될 것이다. 가까운 과거를 제대로 처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두 사람의 차이점을 얼버무리고 넘어갔다. 괜히 건드렸다가 심각한 싸움으로 번질까 봐 진실을 직시하지 못했다. 그들은 선지자의 말처럼 ‘평화가 없는데도 평화, 평화’4)를 외치며 상처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람들과 같다. 갈등의 골을 애써 숨기고 애초에 불화하게 된 원인을 해결하지 않았다. 남편이 사들고 온 꽃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결국 상처는 곪게 마련이다. 언젠가 두 사람의 갈등은 크게 폭발할 것이고 그들은 자신들이 싼값에 화해를 얻으려 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진정한 화해는 싸구려가 아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얻기 위해 독생자의 죽음을 값으로 치르셔야 했다.